‥Sports‥
[올림픽] 제 21회 몬트리올
Ella YUN
2004. 12. 21. 22:19
제 21회 몬트리올 한국 광복후 첫 금메달 획득 |
▣ 메달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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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에 제21회 올림픽이 몬트리올 개최로 결정되자 캐나다는 곧 3억 2000만달러의 예산으로 준비에 착수했다. 그후 석유파동 등에 의해 일어난 인플레이션으로 해서 13억달러로 액수가 늘어나게 되고 정치적 문제까지 겹쳐 몇 번인가 중단위기를 맞기는 했지만 준비는 원만히 이루어 졌다.
몬트리올 올림픽(1976.7.17~8.1)에 한국은 72명의 선수단(임원 22 선수 50)을 참가시켰다. 레슬링 유도 여자배구 복싱 사격 등 5개 종목이 모두 입상 가능한 종목이었으나 사격은 다음해 서울에서 벌어질 세계선수권대회의 주최국으로서 최면을 고려하여 뮌헨때와 마찬가지로 정책적으로 파견됐다.
한국선수단은 올림픽이 개막된지 열흘이 지나도록 단 한 개의 메달도 따내지 못해 노메달로 끝나는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마저 감돌 때 비로소 메달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28일 유도 미들급의 박영철이 동메달을 따낸 것을 시발로 30일에는 라이트급의 장은경이 은메달을 따냈고 여자배구가 동메달을 획득했다.
여자배구의 동메달은 우리의 올림픽 구기사상 첫 메달로 기록되고 있다. 몬트리올 올림픽 여자배구에는 일본 페루 캐나다 헝가리(이상 A조), 한국 소련 동독 쿠바(이상 B조) 등 세계 강호들 8개팀 모두 출전했다.
첫상대인 소련에게는 3-1로 졌으나 동독과 쿠바에 각각 3-2로 역전승하여 조2위로 준결승에 올랐다. 결승토너먼트에서 일본에 3-0으로 패해 3-4위전으로 밀려나 헝가리를 3-1로 꺾음으로써 동메달을 따낸 것이다.
31일에는 레슬링에서 자유형 플라이급의 전해섭이 동메달을 따냈고 이어 자유형 페더급에서 양정모가 대망의 금메달을 따냈다. 양정모 선수는 몽고의 오이도프와 맞붙게 되었다. 양 선수는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세계챔피언인 오이도프를 꺾고 우승했었으나 다음해인 75년 9월 소련 민스크 세계선수권대회에선 패배하여 동메달에 그침으로써 1승 1패의 호각세를 이루고 있었다.
몬트리올 올림픽을 앞두고 양정모의 금메달 획득여부는 오이도프를 꺾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그 오이도프가 1차전에서 미국의 데이비스에게 판정패함으로써 벌점 3점을 안고 불리한 조건으로 결승전에 올랐다.
결승에서 양 선수는 10-8로 판정패했으나 그때까지 무벌점이었던 양 선수가 판정패로 3벌점을 안은 반면 오이도프는 근소한 차로 이겼기 때문에 벌점 1점이 추가되어 4벌점으로 은메달에 그쳤다.
이렇게 해서 양정모 선수는 온겨레의 염원이던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것이다. 실로 한국스포츠가 올림픽에 참가하기 시작한지 28년만에 맞은 경사였다. 손기정 선수의 눈물어린 금메달 이후 꼭 40년만에 이루어낸 쾌거였다.
조재기 선수는 유도 라이트헤비급에 출전했으나 메달권에서 탈락해 버리자 비장한 각오로 머리를 빡빡 깎은채 무제한급에 출전해 패자결승에서 아르헨티나의 포르텔리에게 판정승하여 기어이 메달의 꿈을 이루고 말았다.
모두 5개의 메달(금 1 은 1 동 4)을 따낸 한국선수단은 메달집계에서 19위를 차지하여 금, 은 1개의 북한(메달집계 21위)을 앞서 뮌헨대회에서의 열세를 만회한 것이다.
몬트리올 올림픽은 동독이 세계스포츠의 양대산맥인 미국과 소련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스포츠 강국으로 데뷔한 무대였다. 소련이 금메달 47개로 1위였으며 금 40개의 동독은 금 34개의 미국을 제치고 사상 최초로 2위로 뛰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