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rts‥
[올림픽] 제 20회 뮌헨
Ella YUN
2004. 12. 21. 22:18
제 20회 뮌헨 피의 참사...이스라엘선수 11명 사망 |
▣ 메달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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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올림픽대회(1972.8.26~9.11) 개최가 정식으로 결정된 것은 1966년 4월 26일 로마에서 열린 제64차 IOC총회에서 였다. 뮌헨시에서 대회를 유치하게된 최초의 계기가 된 것은 이 시출신으로서 과거의 유명한 육상경기선수였던 '한스 브라운'(1886~1918)이었다고 한다.
'브라운'은 초기의 독일육상경기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의미에서 그 공적이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그 이상으로 그가 스스로의 성공을 항상 자신의 고향 뮌헨을 위해 추구해 왔다는, 말하자면 그의 향토애가 뮌헨시로 하여금 대회유치를 하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와 마찬가지로 뮌헨시가 낳은 유명한 스포츠선수는 많은데 그 중에서도 훗날 뮌헨올림픽 당시의 IOC위원장인 '브런디지'의 친구로서 육상경기선수인 '릿터 포 할트' (1881~1964)등도 개최지 결정에 이를 때까지 음성적으로 많은 힘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 선수단은 당초 과거 도쿄와 멕시코 두 대회성적을 기준으로 6위이내 입상이 가능할 것으로 확정되는 종목 및 선수를 엄선키로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확정된 선수단규모는 여자배구 복싱 역도 레슬링 유도 등 5개종목에 걸쳐 39명(임원 13, 선수 26)이었는데 이는 52년 헬싱키대회(43명)때 보다도 4명이나 적은 역대대회 가운데서 최소규모였다.
그러나 7월말 프랑스 생디에에서 벌어진 올림픽 배구경기에서 북한을 격파하고 출전권을 따낸 남자배구팀, 현지에서 훈련중이던 육상의 박상수(높이뛰기) 백옥자(포환던지기), 수영의 조오련과 사격선수단(임원1 선수5)이 현지에서 합류함으로써 선수단의 총규모는 62명(임원 6 선수 46)으로 늘어났다.
뮌헨올림픽이 종반을 향해 치닫던 9월 5일은 평화의 축제인 올림픽대회사상 최대의 비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팔레스타인 게릴라 단체인 검은 9월단 8명이 선수촌을 침입,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를 습격했던 것이다.
그들은 선수2명을 현장에서 사살한뒤 9명을 인질로 잡아놓고 이스라엘에 억류중인 팔레스타인 정치범 2백여명의 석방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렇게 되자 브런디지 IOC위원장은 다우메조직위원장과 협의하고 우선 이날의 모든 경기를 중지한다고 발표했으며 브란트 서독총이가 직접 협상에 나섰다.
서독정부 당국은 이들에게 이스라엘측과 협상중이니 일단 장소를 옮길 것을 요청하여 이들이 물러나는 사이 뮌헨공항에서 총격전 끝에 일망타진했다.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선수 9명이 전원 살해됐고 게릴라는 5명이 사망했으며 3명이 체포됐다.
사건 다음날인 6일 메인스타디움에서는 뮌헨오페라하우스의 교향악단이 베토벤의 에그몬트서곡을 연주하는 가운데 하이네만 서독대통령, 브런디지 IOC위원장이 장례식을 집행했다. 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로 초청받은 손기정을 비록하여 한국선수단에서도 여러명이 참석했다.
뮌헨올림픽은 또 북한이 처음으로 참가한 대회로 기록되고 있다. 북한은 10개종목에 걸쳐 82명(임원 12 선수 64)의 선수단을 파견했는데 호칭은 DPRK였다. 이 호칭은 69년 6월 7일 제68차 IOC총회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이다.
북한은 첫 출전한 이번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올렸다. 사격 소구경복사에서 이호준이 금메달, 복싱 라이프 플라이급에서 김우길이 은메달, 레슬링 자유형 플라이급에서 김광형, 유도 라이트급에서 김용익 그리고 여자배구에서 각각 동메달을 따냈다. 특히 여자배구의 동메달은 3,4위전에서 한국을 꺾고 따낸 것이다.
종합순위에서 북한은 22위, 한국은 33위에 그쳤다. 우리 선수단은 유도 미들급에서 오승립이 따낸 은메달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