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발이 뭐길래..
'할리우드 여배우’하면 어떤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시나요?
물론 사람마다 각양각색이지만, 상징적인 이미지라고 하면
아무래도 흰 피부에 화려한 옷차림의 섹시한 금발 미녀 아닐까요?
지금은 많이 달라지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할리우드는
백인, 그중에서도 금발 미남 미녀로 상징되는 ‘주류’들이 주름잡았지요.
과거 영화계가 여배우에게 독립적 캐릭터를 부여하기보다는
무조건 화려함과 여성스러움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었으니까요.
때로는 금발이었기에 어울렸다고 평가받는 배역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에로틱스릴러 '원초적 본능'에서 섀런 스톤이 연기한 의문의 여성이 금발이 아니라 흑발이었다면,
왠지 느낌이 달랐겠지요. (스릴러의 공포는 더 고조됐을지 모르지만 에로틱한 느낌은 좀 감소됐을 것 같지 않나요?)
반대로 또다른 스릴러 '미저리'에서 케시 베이츠가 연기한 여주인공역이 금발이었다면..
이 역시 어쩐지 비사회적인 스토커 캐릭터와 맞지 않았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금발이 주는 이미지는 지능보다는 외모, 집요함보다는 단순, 고독보다는 사교쪽이 크니까요.
풍성한 금발은 뭇남성의 사랑을 받는 화려한 공주 이미지를 상징했고,
그렇기 때문에 스타를 꿈꾸는 미 전역에서 여자들은
할리우드로 ‘무작정 상경’하기 전에 머리부터 금발로 염색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염색은 촌스러운 이름을 버리고 그럴싸한 예명을 짓는 것만큼이나 기본적인 과정이었죠.
동화속에서 '신데렐라'처럼 급격한 신분상승을 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금발이라는 것도 영향이 있었을지 모르겠네요.
금발 여배우의 대표적인 예로 매릴린 먼로를 보세요.
원래는 ‘노마 진 베이커’라는 무미건조한 이름의 다갈색 머리 아가씨였지만
햇살 같은 밝은 금발로 염색하고 ‘매릴린 먼로’라는 부드럽고 고상한 이름으로 바꾼 뒤 대스타가 됐지요.
배우는 아니지만, 미 정치계의 ‘할리우드 스타’급인 힐러리 클린턴은 어떤가요?
무거워보일 정도로 숱많은 긴 검은 퍼머 머리에 부담스러운 검정 뿔테 안경을 쓰고 공부하는
좀더 통통한 웰슬리 대학 시절 그녀의 사진을 본 사람들은 ‘이 사람이 힐러리야?’하고 다들 놀랍니다.
안경을 벗고 렌즈를 끼고 금발로 염색을 하고 세련되게 꾸미니까 ‘한 미모’하는 얼굴로 판명됐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변신 효과를 가져오니 많은 배우들과 가수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심지어 동양인들까지)
'한번 시작하면 계속해야 한다'는 불편을 감수하고 금발 염색을 하는 거겠죠.
그러나 한편 운좋게 금발로 태어난 여성은 '머리가 나쁘다'는 속설과 지독한 비웃음을 감수해야 합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라스베이거스에서 술 마시고 취김에 옛 친구와 결혼식을 올렸던 사건에 대해서도
거기가 ‘도박과 결혼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였고, 스피어스가 만취해 판단력이 흐려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금발이기 때문’이라는 우스개말이 있을 정도지요.
할리우드는 아니지만 영국의 리얼리티쇼(실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프로그램) ‘빅 브라더’에서도
제이드 구디라는 이름의 한 20대 금발 미녀의 엉뚱한 발언들이 전국적인 유머가 되고 있습니다.
‘희생양’이란 뜻의 ‘scape goat’를 ‘escape goat’라고 하는 식으로 툭하면 단어를 틀리게 말하는가 하면
“케임브리지는 어디 있는 거야? 외국에 있는 줄 알았는데.” “리오 데자네이루, 그거 사람 이름 아냐?” 등의
어린애 같은 무식한 말들을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하기 때문이죠.
구디에 대한 기사를 보면 대놓고 말은 안 해도 행간에 '금발은 역시'라는 키득거림이 깔려 있습니다.
하긴 얼마나 금발의 지능에 대한 편견이 심하면그 편견을 역이용하는 영화 ‘금발이 너무해(Legally Blonde)’ 같은 영화가 나왔겠습니까.
이같은 편견과 조롱 때문인진 모르지만, 요즘 할리우드는 예전처럼 ‘금발 천국’은 아닙니다.
오히려 수십년간 금발 염색을 해왔던 사람들이 갑자기 원래 자신의 머리색으로,
혹은 갈색이나 검정색으로 염색하고 나타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너도 나도 염색을 하는 데다가, 염색기술의 발달로 진짜 같은 금발이 너무나 많아져
더이상 ‘귀한 혈통’의 이미지나 눈에 띄는 효과를 주지 못하게 됐으니까요.
너도 나도 금발일 때 동양인처럼 윤기 흐르는 풍성한 검은 머리가 우아해 보이기도 했을테고
외모보다는 개성과 연기력을 존중하는 풍토도 영향이 있었겠지요.
실제로 이미 할리우드는 각양각색의 머리색을 가진 외국 배우들이 점점 세력을 넓히고 있기도 하고요.
요즘 같은 개성시대에 천편일률적인 금발머리에 푸른 눈은 진부한 면도 있습니다.
사실상 ‘할리우드 스타 = 금발 미녀’라는 이상한 공식이 깨지는 것은
동양인인 우리 입장에서나 할?理躍?위해서나 바람직한 일이지요.
아무리 공들여 금발 염색을 해도 이제 누구나 염색한 건지 아는 이상
금발에서 흑발로 온갖 색깔을 왔다갔다 하는 스타들도 있습니다.
스타들의 머리색이 이랬다 이랬다 바뀔 때면 ‘어떤 색이 낫다’는 팬들의 반응도 각각입니다.
미국의 연예전문 웹사이트인 E! 온라인은 최근 금발 스타들을 놓고 인터넷 여론조사를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투표는 계속 진행중이지만 6일 오후 5시30분 현재
가수 맨디 무어는 22대 77로 흑발이 낫다는 평을 받은 반면
배우 새러 제시카 파커는 77 대 22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금발이 낫다는 평을 얻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관객의 머리 속에 굳어진 ‘이미지’라는 것은 쉽게 지워지는 게 아닌 것 같네요.
익숙한 스타일을 갑자기 바꾸면 어색하게 느끼는 보수성이 알게 모르게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겠지요.
사진이 잘 나왔느냐 아니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한장씩만 보고 바로 비교할 순 없지만
아래 사진을 보면서 여러분도 어느 쪽 색깔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지 한번 골라보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금발이냐, 아니냐’가그들에겐 왜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지 모르겠지만요.
/이자연기자 ach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