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랫츠, 바비를 왕좌에서 밀어내다(BBC)’
‘바비 무너지고 브랫츠가 새로운 여왕으로(인디펜던트)’
‘브랫츠가 바비의 왕관을 훔치다(아이리시 이그재미너 비즈니스)’
‘베테랑이 넘버원 자리에서 쫓겨나다(데일리 레코드)’

제목만 얼핏 봐서는 풋내기 도전자에게 패한 권투 세계 챔피언에 관한 내용 같은 이 기사들은 사실 영국의 패션인형에 대한 이야기다. 제목에 등장하는 ‘바비’는 아무리 인형에 관심없는 아저씨라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인형계의 수퍼스타 ‘바비 인형’. 위의 문장들은 오랜 세월 전세계 패션돌(fashion doll)업계에서 최고의 베스트셀링 브랜드로 군림해온 바비가 영국 시장에서 신생 브랜드 ‘브랫츠’에 밀려났다는 영국 언론 기사의 제목들이다.

바비는 1959년에 등장해 반세기 가까이 왕좌를 지켜온 데 비해, 브랫츠는 고작 3년 전엣 첫 출시된 신참내기 인형. 바비가 ‘베테랑’이라면 브랫츠는 ‘뉴 키즈 온더 블럭’이다. 그런데 브랫츠는 지난해 매출이 130% 성장하더니, 지난달에는 1억 파운드에 달하는 영국 패션돌 시장에서 45.1%라는 경이로운 점유율을 기록하며 최초로 터줏대감 바비의 판매량을 앞지르기에 이르렀다(의류 등 액세서리 상품 제외).이 희대의 ‘역전극’에 대해 영국 언론도 떠들썩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까짓 애들 인형 갖고 웬 호들갑이냐’고 하실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서양에서 ‘바비’의 패션돌 세계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나마 바비 인형이 맹위를 떨치지 못하는 편이지만, 미국 등 서양에서 바비는 엄청난권력자다. 지난 40년동안 전세계에서 10억개 이상의 바비 인형을 팔아 온 미국 최대의 장난감 회사 ‘마텔(Mattel)’사의 연 매출은 한때 50억 달러(약 6조원)에 달했다. 미국 여자 아이 1명이 가진 바비 인형만도 평균 8개. 지금까지 팔린 바비를 한 줄로 세우면 지구를 네 바퀴나 돈다. 인형 뿐 아니라 인형에 달려나오는 액세서리나 기구들, 바비 그림이 그려진 온갖 캐릭터 학용품과 가방 등을 합치면 이 회사가 아이들의 생활 곳곳에 미치지 않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다.

웬만한 장난감 가게에는 바비 코너가 있는데, 그것도 큰 매장에서는 화려한 복장의 콜렉션용 바비가 유리 전시관 안에 ‘전시’되기까지 한다. 우리가 박물관 가서 유리 전시관 안에 마네킹에 입혀져 있는 궁중의상을 관람하듯, 서양 아이들은 유리 전시관 안에 바비가 입고 있는 각국의 전통의상을 보며 ‘이건 인도 옷, 저건 일본 옷’하고 배우는 것이다. 바비가 40회 생일을 맞은 99년에 마텔은 다이아몬드 160여개가 박힌 8만달러(1억여원) 짜리 드레스를 특별 제작해, 이 옷을 입은 바비를 런던에서 열리고 있는 데이비드 모리스 국제 보석 전람회에 내놓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여자 애들 장난감인데'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미국에서 바비는 결코 ‘아동용’이 아니다.바비는 상당히 고가(高價)의 장난감이며, 성인 가운데도 바비를 수집하는 ‘바비 매니아’가 남녀를 불문하고 엄청나게 많다. 이 바비들은 시중에 한창 유행인 옷을 입고 있기도 하고(위 사진 속 원숭이 캐릭터 잠옷 입은 바비 참조), 엄청난 값에 주문 제작하기도 한다. 마케팅 차원이겠지만 호텔 등에서 고상한 회의가 열리는 컨퍼런스홀 앞에 바비 인형들이 패션쇼 벌이듯 전시돼 있는 경우도 가끔 있다.




007과 본드 걸 바비, 마릴린 먼로 바비, 킹콩 손에 잡힌 제시카 랭 바비 등(각각 위 사진 참조) 영화 캐릭터 바비도 있으며, 가터벨트 차림의 야시시한 ‘성인용 바비’에, 심지어 게이 바비도 있다. 바비의 패션 및 취향 변화에 따라 미국의 사회상을 분석하는 소위 ‘바비 학자’들도 미국내 여러명이다. 바비의 연애생활도 결코 지고지순하진 않다. 오랜 세월 자신의 남자친구 캐릭터로 등장했던 ‘조강지부’ 켄은 올해초 차버리고, 서핑을 즐기는 ‘블레인’으로 갈아치웠다. 물론 다 돈을 벌기 위해서다. (소비자들이 은근히 켄을 지겨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배우 한채영이 2001년 ‘미스 바비’ 출신이라는 내용을 종종 미디어에서 볼 수 있듯, 마텔이라는 회사는 인형이 아닌 실제 사람들을 상대로 미인대회까지 열 정도로 엄청난 기업이다. 바비 매니아를 위한 전문월간지 ‘TY BINY BABY’도 있다. 피켜 스케이트 요정 남나리도 바비 매니아로, 바비 인형을 1000개쯤 모아 이 잡지에 소개된 적이 있다. 지금은 떠났지만 97년 마텔의 여성 회장으로 취임했던 질 바라드는 당시 휴렛 패커드사 대표이사 칼리 피오리나, 에이본 프로덕츠(화장품)의 안드레아 정(중국계)과 더불어 미 5백대 기업을 이끄는 여성 3인방중 한명으로 꼽힐 정도로 위세가 당당했다.
한채영의 몸매가 대한민국 일반 여성들에게 좌절감과 열등의식을 안겨주듯, 8등신의 말라 비틀어진 긴 팔 다리에 허리는 졸라맨 것처럼 쏙 들어가고 가슴만 괴기스럽게 불쑥 솟아 있는(실제로 나는 어릴 때 그 로켓처럼 튀어나온 딱딱한 가슴이 왠지 무서웠다. 진짜 바비도 아니고 ‘짝퉁’이었지만서도) 기형적 몸매가 소녀들에게 미치고 있는 악영향도 적지 않다. 게다가 바비인형은 대부분 흰 피부에 푸른 눈, 금발머리를 가진 소위 ‘이상적 백인상’을 갖고 있어, 이 인형을 갖고 노는 다양한 인종의 각국 어린이들에게 무의식적으로 백인종에 대한 동경을 심어주는 면도 무시할 수 없다. 실제로 많은 아이들이 ‘공주’ ‘미녀’ 하면 자연스럽게 금발머리 바비를 떠올리고 있고, 또 barbie라는 단어가 아예 '전형적인 미국인'이라는 의미로도 쓰일 정도니, 과거 그림동화 ‘미녀와 야수’ ‘신데렐라’가 했던 백인우월주의 캠페인을 인형계에선 ‘바비’가 하는 셈이다.
물론 이같은 비판을 의식해 바비측에서도 좀더 다양한 인종의 바비 인형을 만들어냈다. 또 70~80년대 바비의 복장에 경찰, 의사, 군인, 대통령 후보 등의 직업을 반영함으로써(하긴 바비를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 앉히는 인심을 쓴들 돈 드는 일도 아니지 않는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장려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하기사 ‘여.친.소’에서 제복 입은 전지현이 너무 예뻤다는 이유로 경찰이 되고 싶어진 소녀들도 있을테니 아주 틀린 말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바비의 그같은 변화는 어디까지나 다양한 인종과 생각의 소비자를 공략하기 위한 전략일 뿐이다. 또 아무리 피부를 흑인처럼 어둡게 만들고, 동양인처럼 머리를 검게 하고, 때론 이슬람 히잡까지 씌워 봐도, 바비는 바비일 뿐이다. 바비는 언제나 화려하고 귀티나며, 청바지를 입어도 공주 같다. 거칠게 말하자면 온몸에 돈으로 치장하고 있는 느낌이다. 중요한 것은 요즘 아이들이 옛날처럼 ‘꿈나라 공주’에 껌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형을 갖고 노는 연령층이 점점 낮아지고 있는 데다, 전통 장난감이 비디오와 컴퓨터 게임에 밀리면서 94년 이후 마텔사의 수익은 갈수록 하락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듣도 보도 못하던’ 신참내기 브랫츠에게 45년 왕좌를 빼앗기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담 도대체 브랫츠가 무엇이길래?


2000년 미국의 MGZ엔터테인먼트사가 출시한 브랫츠는 개성있는 외모가 척 보기에도 바비와 딴판이다. 8등신은커녕 3등신에 가깝고, 금발에 푸른 눈 일색도 아니다. 오히려 날카롭게 치켜올라간 눈매는 동양적이고 두툼한 입술에선 흑인이 연상된다. 전형적 미국 미녀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서양인들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외국계의 얼굴에 가깝다. ‘3세 이상’ 유아까지 타깃으로 포함시키는 바비와 달리 과감히 ‘8세 이상’을 목표로 내건 브랫츠는 2002년 세계 전반에 수출되기 시작해, 지금까지 100여개국에서 약 8000만개가 팔려나갔다. 무서운 신장세다.
브랫츠가 내세우는 슬로건은 ‘패션에 대한 열정을 지닌 소녀들(The girls with a passion for fashion)’. 그만큼 패션을 강조하는 브랫츠의 옷차림은 미국 틴에이저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길거리 패션’이 주류를 이룬다. 꼭 맞는 탑(끈나시)에 통넓은 나팔바지, 큼직한 벨트에 통굽 구두, 머리를 높이 치켜올려 묶은(결코 고상해 보이진 않지만 10대들이 쿨하다고 생각하는) 포니테일 헤어... 말하자면 ‘펑키 스타일’이다. 바비 스타일의 나풀거리는 공주 드레스는 브랫츠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드레스는 한마디로 ‘한물 갔다’는 얘기다.
브랫츠 영국 지사의 닉 오스틴 회장은 브랫츠과 바비를 ‘다윗과 골리앗’에 비유하면서 “빠르게 변화하는 오늘날 소비자들에 더 가까운 점’을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매텔사 대변인은 “바비는 여전히 세계에서 36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내는 넘버원 브랜드”라고 일축했다. 문제는 바비를 위협하는 인형이 브랫츠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비의 오랜 라이벌인 60년대 영국 인형 ‘신디’도 재출시 될 계획이다. 신디는 서민적이고 수수한 차림새로 80년대 영국 패션돌 시장을 제패했으나, 90년대 바비에 참패했다. 그러나 브랫츠의 성공을 보면서 신디라고 못할 건 없다는 희망을 얻었을 것이다. 물론 브랫츠의 승리는 영국 내에서만의 얘기지만, 그래도 영국에서 뒤집힌 이상 어느 나라에선들 안 뒤집힌다는 보장이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정말 ‘반세기 여왕’ 바비의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는 것인가? 과연 ‘친근한 서민 인형’이 ‘화려한 귀족 인형’보다 소비자에게 어필하는 시대가 올 것인가?
패션돌의 여왕이 바비건 브랫츠건 신디건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왠지 너무나 전형적이어서 개성 없게 느껴지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태어난 이후로는 한번도 1위 자리를 놓친 적 없던 금발미녀 바비를 ‘통굽 구두에 나팔 청바지 입은 새내기’가 꺾을 수도 있다는 소식이, 통굽 구두에 나팔 청바지는 있지만 공주 드레스는 없는(8등신은 더더욱 아닌) 나에겐 보다 반갑게 느껴진다. 일본의 영향과 영화 ‘인형사’의 영향으로 값비싼 ‘구체관절 인형’과 ‘브라이스 인형’ 등이 때아닌 관심을 모으고 있는 요즘, ‘바비 짝퉁’ 또는 ‘종이 인형’의 막바지 세대로서 우리나라에서의 향후 패션돌 시장 추이가 궁금해진다.
P.S.
장황하게 쓰고 보니 마치 제가 무슨 인형 매니아 또는 고급 콜렉터나 되는 것 같은데, 사실 저는80년대 ‘The dolls’라는 공포영화 비디오를 본 뒤론 사람 모양의 딱딱한 인형은 죄다 이유없이 무서워하는 편에 속한다는 점을 추가로 밝혀둡니다. (옛날에 엄마가 사주신 팔뚝만한 소녀 인형도밤마다 절 쳐다보는 것 같아서 안 보이게 책 뒤에 감춰놓은 뒤론 아직도 섬뜩해서 못 꺼내고 있습니다...)
Posted by Ella 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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