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여섯살에 죽은 한 여자에 대해 뭐라 말할 것인가. 전세계 미디어 스포트라이트 속에, 20세기 ‘최고의 결혼식’을 올리며 영국 왕실에 시집온 왕세자빈이었다고? 생전 그 어떤 이보다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많이 받았다고? 바람난 왕자(전 남편)에 화가 나 맞바람을 피웠던 행실바르지 못한 여성이라고? 그 모든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톱스타보다 더 대중적 사랑을 받은 세계인의 연인이었다고? 그리고 아름다웠다고?

미국 작가 에릭 시걸의 ‘러브 스토리’를 흉내내 표현해본, 서른여설살에 죽은 이 여자는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빈입니다. 오늘 새벽 YTN을 보다 ‘오늘의 역사’편에서 7년전 오늘 그녀가 죽었다는 얘기를 우연히 시청했지요. 그리고 잠깐 생각에 잠겼습니다. 개인적으로 지금도 너무나 보고 싶은 인물, 너무나 사랑스런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 왜 제가 이처럼 집착하냐구요?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7년전 다이애나가 죽었을 때 저는 문화부 기자였는데, 그녀의 죽음에 대한 칼럼을 쓰게 됐습니다. 왜냐구요? 그해 7월 1년간 런런 연수를 마치고 귀국했는데, 한달 뒤 다이애나 사망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런데 편집국 선후배 기자들이 궁금해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독자에게 알려주라며, 국-부장단 회의에서 제가 칼럼 필자로 정해졌다나요? 그 의문은 이랬습니다.

“비록 왕세자와 이혼했다고는 하지만、 ‘세손’ 어머니가 외간 남자와 해외에서 밤늦은 밀애를 즐기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런데 전 남편인 왕세자는 그런 전 아내의 유해를 운구하러 왕실 전용 특별기에 올랐고, 시어머니였던 여왕을 비롯해 왕실은 ‘극도의 충격을 받았다’며 애도했다. BBC TV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버킹엄궁앞엔 조화가 쌓였다. 「백성들」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빈 사망 소식이 전해진 뒤、 영국과 서방에서 나타난 반응들에는 우리 정서로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너무 많다. 왜냐?”


당시 국내에는 PC 통신에 “별 스캔들을 다 만들더니 정말 기구하게 살다 가는구나” “왕실 이름을 더럽히더니 죽음으로 죄값을 치른 것” 등의 견해가 떴습니다. 이게 우리 정서지요. 그런데 왜 영국인들은 다를까요?

제가 1년간 머문 동안 영국에서 그녀는 특히 일반 서민의 우상이었습니다. 블루 칼라를 독자로 삼는 타블로이드판 옐로우 페이퍼들에 다이애나는 그래서 최고 상품이었지요. 1996년 8월28일 찰스와 이혼한 이튿날、 4백만부를 찍는 대중지 ‘더 선’은 1면부터 10여개면에 다이애나 특집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선지가 조사한 국민 정서’를 “바이 바이、 큰 귀(찰스 왕세자)”라고 표현했지요. 이 신문은 “오늘은 이혼녀로서 다이애나의 새 생활이 시작되는 첫날”이라며、 그녀의 ‘인디펜던스 데이’를 축하하자고 했습니다.

다이애나는 신분 상승의 상징이었습니다. 일종의 ‘동일화’ 효과를 발휘했던 셈이지요. 그래서 그의 애정행각에도 영국인들은 비교적 관대했던 것 같습니다. 찰스 왕세자가 카밀라 파커 볼스라는 여인과 먼저 바람을 피운 뒤、 복수심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동정하는 이가 더 많았습니다. 1995년 11월 다이애나가 외도를 고백한 BBC TV ‘파노라마’는 1천5백만 시청자를 울리기도 했습니다.


"나는 윌리엄과 해리를 정말 사랑합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지요"

"나는 가끔 아이들을 힘껏 껴안고서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곤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언제나 '엄마' 라고 대답해 주었다."

"아이들이 내 주위에 있다는 게 행복해요. 아이들은 내 인생의 활력소에요."

"나는 크면 경찰이 될 거야. 그래서 엄마를 잘 보호해 줄 거야." 윌리엄 왕자

"안돼, 형. 형은 왕이 될 거잖아!" 해리 왕자

윌리엄이 기숙사로 떠나던 날 나는 휴지 상자?얼굴을 묻고 울었다.

"나는 아이들이 머리가 차가운 사람보다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이애나-

더욱이 다이애나는 ‘새장 속 새’이기를 거부했지요. 이 대목부터가 진짜 제가 얘기하고 싶은 내용입니다. 그녀는 보수당 정부가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대인지뢰 금지운동을 벌이러 앙골라를 방문했고, 이 캠페인은 노동당 집권후 국가정책으로 채택됐습니다. 1996년 9월 유방암 퇴치행사 참석차 워싱턴을 찾았을 때 그녀는 아침을 백악관서 힐러리 클린턴과、 점심은 캐서린 그레이엄 워싱턴 포스트 사주와、 만찬은 걸프전영웅 콜린 파월、 엘리자베스 돌 전장관、 TV인터뷰어 바바라 월터즈와 함께 했습니다. 왜냐구요? 이들을 만나며 그는 약하고 소외받은 이를 위한 모금 문제 등을 논의했던 것입니다.

그는 세계를 돌며、 에이즈 퇴치와 심장병 암환자、 고아、 행려자 돕기 자선에 참여했습니다. 이혼협상 때 다이애나가 요구했다가 영국 왕실이 거부했다는 ‘순회대사’직을 사실상 그녀는 당차게 해냈습니다. 그녀에게 “나는 영국 왕세자빈”이라는 소개는 필요하지 않았던 지도 모릅니다. “다이애나” 그 이름이면 충분했던 거지요.

조선일보가 새해 시작한 ‘우리이웃’ 시리즈가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취지의 기획이지요. 이 프로젝트 초기에 한때 참여하면서 느낀 점은 여전히 이같은 기부의 효력은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다이애나의 헌신으로 수혜를 받은 어려운 이웃은 엄청날 것입니다. 그녀가 죽은 뒤에도 그녀가 주도했던 수많은 모금 운동은 이어질 것이고, 그가 생전에 설립을 도왔던 자선재단은 지금도 어디선가 우리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중입니다.


다이애나 왕세자빈이 죽은지 7년이 지났지만 그녀에 관한 책과 다큐멘터리는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전세계 미디어의 화제에 오릅니다. 다이애나의 삶은 그 누구보다 화려하면서 극적인 요소가 많았지요. 스무 살 나이에 동화 속 공주처럼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지만 남편 찰스 왕세자와의 결혼생활은 불행했고, 1992년부터 공식적으로 별거 상태에 들어가 1996년에는 15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이혼. 그리고 이듬해 부유한 애인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파리의 지하차도에서 교통사고로 비극적 삶을 마칠 때까지.

다이애나는 윈스턴 처칠 전(前) 총리, 세익스피어 등과 함께 영국인들이 뽑은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고, 시사 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의 인물’에도 들었습니다. 요즘 영국에선 다이애나의 빈 자리를 대체할 영웅은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 밖에 없단 말도 나온다네요.

다이애나가 남긴 ‘신데렐라’ 동화는 대중이 조작한 ‘신화’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절반 이상은 다이애나 스스로 만들어냈으니까요.

정말 다이애나가 그립습니다.

진성호 님(mhgr)
조선일보 '턱수염' 진성호 기자(미디어팀장)의 눈에 비친 세상 모습, 특히 미디어창 속 세계을 담습니다

Posted by Ella 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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