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슈퍼맨' 그가 남긴 희망의 메시지

미디어다음 / 김준진 기자

‘슈퍼맨’ 크리스토퍼 리브. 그가 10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영화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슈퍼맨’이었다. 사고로 인한 척수마비라는 중증장애를 딛고 일어서 전세계 장애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준 진정한 의미의 슈퍼맨이었다. 그리고 그는 갔지만 세계인의 가슴을 울리던 그의 언행은 남았다.

리브는 78년부터 87년까지 네 편의 ‘슈퍼맨’ 시리즈의 주인공을 맡으며 영화계라는 창공으로 비상했다. 한창 유명세를 타던 그는 95년 5월 불의의 낙마사고로 어깨 아래 전신이 마비되는 중증 장애를 얻게 됐다. 장애 후 그는 한때 자살까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내 다나의 헌신적인 사랑과 가족애는 그를 다시 일어서게 했고, 본인과 같은 처지의 척수마비 장애인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게 했다. 그는 연방의회에서 장애인을 위해 연설해 정부의 관련 예산까지 끌어냈고 휠체어에 앉은 채 TV영화의 메가폰을 잡는 불굴의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척수마비 장애인들의 치료를 위해 줄기세포 복제연구를 적극 지지하기도 했다.

그는 “50세 생일인 2002년 9월 25일 자신의 힘으로 걷겠다”는 자신의 다짐을 결국 지키지는 못했지만 그에 버금가는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그가 생전에 남긴 말을 통해 그의 발자취를 다시 되새겨 본다.




'슈퍼맨' 복장을 입은 1970년대 당시 크리스토퍼 리브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에요. 그리고 난 당신을 사랑해요”
리브가 95년 5월 27일 승마경기 도중 낙마해 전신마비가 되자 병원에 달려온 아내 다나 리브가 그를 보고 처음으로 했던 말이다. 다나의 헌신적인 사랑이 담긴 이 한마디는 한 때 자살까지 결심했던 리브를 ‘재활의 전도사’, ‘희망의 메신저’로 거듭나게 했다.

“처음에는 아이와 운동 등을 함께 하지 못할 것을 걱정했다. 그런데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아이가 충분히 행복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한다”
사고를 당하고 처음으로 가족끼리 맞이한 추수감사절. 식탁에서 세살이던 아들 윌이 “아빠가 있다는 것이 감사해요”라고 말하자 리브는 더할 나위 없이 마음 속으로 감사했고 후일 그 이야기를 고백했다. 아내 다나를 비롯한 가족의 사랑이 그가 재활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던 근원적 힘이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또 사고 이후 가족들과 좀더 친밀해진 것에 대해서도 감사했다.

“내게는 한 가지 목표가 있다. 그것은 내 50세가 되는 생일에 혼자 힘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재활을 위해 힘이 돼준 가족들과 축배의 잔을 들고 싶다”
사고 이듬해 리브가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했던 말. 그는 휠체어에 의지한 채 기관지 튜브를 통해서만 호흡이 가능한 전신마비 상태에서도 사고 1년 뒤부터 왕성한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미국 연방의회에 나가 척수부상연구 예산증액을 요청했고, 한 만화영화의 배역 녹음을 했다. 또 그는 그 해 열렸던 애틀랜타 장애인올림픽에서 사회를 맡았고 전미척수마비협회 이사장으로도 선출됐다.

“나는 일함으로써 분노나 좌절 대신 해방감을 느낀다. 많은 것을 빼앗겼지만 창조적인 길을 찾아낼 수 있게 된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1996년 11월 무렵, 리브는 케이블TV인 HBO의 드라마 ‘황혼 속에서’의 감독으로 촬영 현장을 누볐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모니터와 마이크를 통해 연기를 지시했다. 그의 감독데뷔작 ‘황혼 속에서’는 다음해인 1997년 4월20일 미국 전지역에 방영됐다.

“전신마비 장애인도 아름다운 여자와 사랑할 수 있고 스릴러물의 주연도 맡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
1998년 11월 23일 리브는 TV영화 ‘이창(Rear Window)’ 주인공으로 안방에 돌아왔다. 영화에서 휠체어를 탄 사진기자역을 맡았던 그는 목에서 호흡기가 빠져 숨을 못 쉬자 이빨을 부딪쳐 간호사에게 알렸던 자신의 절박했던 지난 경험도 영화에 그대로 녹여냈다. 당시 이 영화에 대해 평론가들은 “영화는 범작이지만 리브의 얼굴표정 연기는 최고”라며 경의를 표했다.


지난해 11월 24일, 뉴욕서 열린 제 13차 연례 '크리스토퍼 리브 마비 재단' 자선 행사장에 크리스토퍼 리브가 부인 다나와 함께 도착해 사진기자들을 위해 포즈를 취하던 모습.[사진=연합뉴스]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했다. 진실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다”
1999년 7월, 리브는 자신의 투병기와 재활기를 담담하게 정리한 고백서 ‘절망서 길어올린 희망-사랑’를 냈다. 그는 이 책에서 “사고 전까지 내게 산다는 것과 활동한다는 것은 둘이 아닌 하나였다”며 “사고 후 둘이 서로 달라졌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그가 느낀 가슴앓이도 솔직히 책을 통해 풀어냈다.

“태어나지도 않은 배아의 권리 때문에 죽어가는 환자들의 권리를 무시할 수 없다”
2001년 5월, 리브는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가톨릭 교단의 배아복제 반대에 편승해 배아에서 추출해 낸 줄기세포를 이용한 연구를 금지시키려 한다”며 7명의 과학자들과 함께 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줄기세포는 어떤 조직으로든 성장할 수 있는 세포로 과학자들의 줄기세포 연구가 난치병 치료에 획기적인 전기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공화당 정부는 결국 배아복제 연구를 금지했다.

“나는 영국으로 가겠다. 나는 안전하고 치료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치료법이 있는 곳이면 세계 어느 곳이든 가겠다”
리브는 2002년 2월 27일로 예정된 영국 상원의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보고서 발표를 앞두고 미국 내에서 금지된 배아복제 연구가 영국에서는 허용되기를 바란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영국 상원이 줄기세포 연구가 생명파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인정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작은 자극에도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큰 선물. 비록 휠체어에 의존해야 하지만 정신은 이전과 다름없다”
2002년 9월 10일, 리브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그의 손가락과 발가락이 약간씩 움직였던 것이다. 그는 또 대부분의 신체 부위에서 따끔한 느낌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감각을 되찾기도 했다. 그의 주치의 미 워싱턴대 신경과 존 맥도널드 박사도 “목뼈가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이 ‘목 아래는 절대 쓸 수 없을 것’이라는 의학적 예상을 깨고 이만큼 움직이는 경우는 처음”이라며 놀라워 했다.

“이젠 커피 냄새를 맡게 됐다. 코를 통해 제대로 숨쉬는 소리를 들어본 게 무려 8년 만”
2003년 3월, 리브의 상태는 계속 호전돼 인공호흡장치를 제거하는 수술까지 받았다. 예전에는 스스로 호흡할 수 있는 시간이 1~10분에 불과했지만 수술 후 15분~2시간까지 자신의 힘으로 호흡이 가능해졌다.

그는 같은 해 9월 14일 미국의 노벨의학상으로 불리는 ‘래스커상’ 공공봉사 부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래스커상 수상자 선정위원회는 “리브가 장애인 대상 연구의 과학적이고 정치적 측면에 대해 스스로 깨우치고 여기에 과거 배우로서 명성을 더해 정부 관리와 일반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연구발전에 기여했다”고 선정이유를 설명했다. 리브는 이 무렵 수영장 벽을 박차고 나가며 헤엄을 치는 등 시간이 지날수록 의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더욱 진전된 연구로 전세계 수백만명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달라”
2004년 6월 2일 생명복제의 세계적 권위자 황우석 교수(서울대)에게 리브가 보낸 비디오 메시지에 담겨있던 말. 황 교수는 당시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복제과학 학술회의에 참석했었다. 리브는 황교수를 꼭 만나고 싶어했지만 그의 건강이 악화돼 둘의 만남은 이뤄지지 못 했다.

Posted by Ella 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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